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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의 영화

간디(1989) GANDHI

by 무비인생 2022.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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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1989

그저 영화를 감독하고 싶었을 뿐이다 - 아텐보로 감독

 

모한다스 카람찬드 리처드 간디(1869~1948)의 일생을 그린 영화 <간디>는 1962년 아텐보로가 처음 프로젝트를 구상하였고 구체적으로 영감을 준 것은 "사람들이 다름 사람에게 굴욕을 가함으로써 자신의 명예가 높아진다고 느끼는 것은 나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라는 간디의 말이었다. 아텐보로는 1969년 <오 왓어 러블리 워>로 감독데뷔를 했고 <간디>의 제작비를 준비하는 십팔 년 동안 다른 감독이 더 적합하다는 얘기를 들어왔으며, 로버트 볼트 등의 작가들이 대본 작업을 시도했지만, 결국에는 간디의 생애와 성취의 정수를 가장 완벽하게 묘사한 존 브릴리의 대본으로 결정지었다.

그 사이 알렉 기네스와 피터핀치, 앨버트 피니, 로버트 드니로와 더스틴 호프만 등 여러 세대의 주연배우들이 거론되었지만, 결국 선택한 배우는 인도인 아버지에게 외모를 물려받은 무명배우인 벤 킹슬리였다. 그는 역할에 집중하기 위해서 체중을 감량하고 요가를 배우고, 물걸레질하는 검소한 일상적인 모습까지 닮아가려고 노력했다. 

브릴리의 대본은 1948년 간디의 암살 사건으로부터 시작해서 암살사건과 젊은 변호사 시절 남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반대 시위를 벌이는 1893년으로 돌아간다. 간디는 영국의 제국주의 지배에 저항하고, 사회적, 문화적으로 인도의 통합을 위해 힘쓰는 그의 일생의 주요한 사건들을 추적한다. 평화적인 시위를 지양하는 간디의 열정적인 주장은 오히려 죽음과 폭력을 불러왔으며, 자신의 오랜 감옥생활로 이어지게 되었다. 영화 대부분의 장면이 실제 역사적 장소에서 진행되었으며, 장례식 장면은 라지파트에서 진행되었으며 11대의 카메라와 사십만 명에 달하는 엑스트라들을 등장시키게 된다. 만드는 과정이 장시간 길어지면 첫 영감이 떨어져서 관객에게 전달이 잘 안 된다는 편견을 완전히 부수어주었다. <간디>는 영화인들의 비평적 찬사를 받으며 전 세계 관객에게 큰 호응을 얻데 되었다. 아카데미상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미술감독상, 촬영상, 의상, 편집상, 미술상 등 8개 부문에서 수상은 1959년작 <벤허>를 제외하고 최고의 기록이었다. 감독 아텐보르가 얻은 가장 큰 보람은 <간디>를 통해서 관객들이 더욱 풍요로운 내면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 간디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현대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며, 인도 독립의 아버지라 불리는 있다. 인도 서해안의 포르반다르 지방에서 태어났다. 조혼의 관습 때문에 13살에 결혼을 하고, 19세에 영국으로 유학을 하였다. 이너템플 법과대학을 진학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었지만, 영국 문명의 생활보다는 오히려 인도인으로 깊은 자각을 느끼고 있었다.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남아프리카에 있는 인도 상사의 고문변호사로 근무하였다. 20여 년 동안 흑인 일군들이 겪어야 하는 신분상의 불이익과 백인들의 횡포에 맞서는 등 인권옹호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때 간디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은 인도인들에게 이 전쟁에 협력해주면 자치를 시켜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약속을 믿은 간디는 앞장서서 인도인들의 단합과 영국을 지지하자고 호소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 오히려 언론을 탄압하고 강압적인 정책을 펼쳐나갔다. 간디는 인도적 민족운동을 위에서 선두에게 자주권을 부르짖었다. 비폭력으로 무력의 억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1930년 토 고령 나이로 인해 정치투쟁 일선에서 물러났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다시 민족운동의 선봉에서 나치의 잔학성에 항거하자고 호소하였다. 이때, 지도자들은 거의 투옥이 되었으며, 간디도 투옥되었다. 간디는 옥중에서 아내를 잃었다. 1947년 8월 15일 평화적으로 인도는 독립을 하였다. 그러나, 무슬림의 파키스탄과 힌두교의 인도가 분리 독립되었고, 간디는 독립식에 참석하지 않았으면 무슬림과 힘두교의 융합을 원하고 있었다.

간디는 1948년 1월 30일 기도회에 참석하러 가던 중 79세 나이에 두 종교의 융합을 반대하는 과격 힌두교도의 총탄에 암살당하고 만다. 간디의 사상은 비폭력에 의한 무저항주의는 끝내 실현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되었지만, 아힘사(Ahimsa)라고 불리는 비폭력주의는 인도인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다.

 

절망을 느낄 때 나는 기억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진리와 사랑이 늘 승리했다는 것을!

독재자도 살인자도 있었고
그들에게 당장 대항할 수 없어 보야도 결국엔 무너진다는 것을!

이것을 생각하라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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